최황

누구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퍼포먼스 / 싱글채널 비디오, 18분 / 콘크리트와 황동으로 만든 조각, 2020

 

강변을 따라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강 건너로 테크노마트가 보였습니다. 그러다 산책로에 떨어진 편지 하나를 주웠습니다. 편지봉투에는 “에피메테우스로부터”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곧장 구글 창을 열어 에피메테우스를 검색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이랍니다.

편지의 내용을 모두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편지를 우연히 주운 자의 윤리 같은 것이죠. 다만 에피메테우스는 편지에 다음과 같은 부탁을 했습니다.

1. 불을 제자리로 옮겨 둘 것

2. 불이 꺼지는 것을 지켜볼 것

3. 불의 기일을 조용히 기념할 것

아무리 생각해도 이 편지는 누구에게 전달된 적 없는 것 같아요. 불이 제자리로 옮겨졌다는 소식도 어떤 불이 꺼졌다는 소식도 불의 기일이 조용히 기념된 적도, 제 기억엔 확실히 없습니다. 세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거죠. 저는 편지에 적힌 에피메테우스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두 개의 불을 찾아내 제자리로 옮기고, 불이 꺼지는 것을 지켜보고, 이 일을 기념합니다.

황당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저는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에 올림픽대교 위의 조형물과 관련된 더 황당한 이야기와 마주쳤습니다. 조형물을 설치하던 헬리콥터 프로펠러가 조형물과 충돌해 추락한 사고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도 잠시, 사회와 미술계에서 그와 관련된 그 어떤 언급조차 없다는 것에서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고의 전후 맥락을 알아보기 위해 서울시의회 회의록을 뒤지다가 더 기막힌 이야기들을 찾아냈습니다. 조형물 제작을 위해 예산을 책정하는 회의에서 누군가가 “얼마나 아름다운 게 올라갈지 모르겠지만 교통 통제까지 하면서 필요불급한 걸 설치하면 시민들이 반길 것 같지 않다. 방해되지 않도록 공중에 떠서 작업할 거냐”는 말을 합니다. 공모를 통해 작가를 선정했다는 책임자의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것도 그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20년 전, 그러니까 2001년의 이야기입니다.

전시와 작업을 통해 아주 간단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째서 그동안 공공의 미술을 둘러싼 세계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