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조각/내기는 공공과 미술이 만나는 곳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다룹니다. 이 프로젝트는 좋은 공공미술을 만들어보려는 실험도 아니고, 구태의연한 공공미술에 비난의 칼날을 하나 더 쑤셔 넣으려는 시도도 아닙니다. 우리는 공공미술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살피기보다는, 그것의 존재 자체를 묻습니다. 공공미술이라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왜 공공미술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런 질문들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공공미술은 존재합니다. 너무 많아서 문제가 있죠. 저 광장에는 언제나 기념비가 우뚝 서 있습니다. 소위 ‘건축물 조각’이라고 불리는 특정 양식의 조각들이 곳곳에 가득하기도 합니다. 공공의 기금 투입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공공기관에서 공공사업으로 진행되기도 하죠.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토록 많은 공공들이 공공이라는 관념에 대한 사유를 전혀 끌어내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공공은 양가적인 개념입니다. 공공이나 공동 같은 개념들은 항상 개인과 집단의 변증법 속에 존재합니다. 공동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단수들의 집합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개인을 집단으로 치환해버리는 것처럼 보이곤 합니다. 사실 공동이라는 개념은 실제로 그렇게 작동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공동의 삶을 추구하는 경제적 이데올로기인 공산주의를 전체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그렇다면, 공동이나 공공이라는 관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혹은 아예 불가능한 것일까요?

 

전체주의에서 벗어나는 공동의 영역을 작도해볼 수는 없을까요? 단독적인 존재들이 연결된 상태를 사유할 수는 없을까요? 혹은, 존재 자체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라면 어떨까요?1장-뤽 낭시, 박준상 옮김, 『무위의 공동체』, 인간사랑, 2010, p.30. 질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어떠한 것을 공공 미술로 부르려면, 공공이라는 개념에 이러한 방식으로 미학적인 의문을 깊숙이 찔러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공공을 깨뜨리면서도, 공공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작동시키는 형상을 상상합니다.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덩어리로 개별적인 존재들을 환원하는 전체주의적 구심력이 있습니다. 그것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는 존재들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만큼의 힘을 발휘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이죠. 공동은 안쪽에도 바깥쪽에도 있습니다. 거부하는 존재들의 연합, 즉 부정으로서의 연대는 또 다른 공동의 전선을 그려냅니다. 어떻게 보면 오직 그러한 부정만이 진정한 의미의 연합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2Georges Didi-Huberman, Uprisings, Gallimard/Jeu de Paume, 2016, p.350.

 

그러니까 우리는 공인된 공공의 영역 바깥에서 다른 공공이 다시 솟아오르게 할 것입니다. 모두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광장은 애초에 단수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하나의 광장이라고 해도, 그것에는 수많은 장소들이 겹쳐있습니다. 게다가 많은 경우 오늘날의 광장은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기도 합니다. 코로나19로 진공 상태가 되어버린 광장들은 또 어떻고요. 여기에서 우리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변증법으로 광장성에 틈을 벌리고, 공동체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구멍을 드러내는 것을 시도합니다. 누군가는 공공이라는 이름 아래 불타버린 존재들을 다시 기억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산산 조각난 광장의 조각들이 이리저리 빛을 산란시키며 그려낼 별자리를 생각합니다. 모두가 볼 수 있는. 그러나 모두가 다르게 연결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