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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팔라흐(Jan Palach)의 이름을 검색하면 그가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서 불타고 있는 컬러 사진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프라하와 한국 사이의 거리, 그리고 1969년과 2020년의 시차를 압축시키는 사각형 이미지이다. 계속 눈에 밟혔던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그 광장에 서 있고 싶도록, 아니 가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몇몇 블로그에서는 이미지를 첨부하고 별다른 캡션을 붙이지 않아 진짜 역사 속 그 순간이라 믿게끔 하였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영화 속 장면이다.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 프라하의 광장을 머릿속에 새긴 것은 바로 이 영화 속 불타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진짜 역사 속에 기록된 얀 팔라흐의 모습이 아니기에 그는 보르헤스 소설 주인공과 같은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는 불길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불길은 그의 살을 물어뜯지 않았다. 불길은 그를 쓰다듬었고, 아무런 열기도 없이 아무것도 연소시키지 않은 채 그를 불로 뒤덮었다. 안도감과 치욕감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는 자기 역시 그를 꿈꾸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의 환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1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송병선 옮김, 「원형의 폐허들」, 『픽션들』, 민음사, 2011,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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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조각/내기》 홈페이지(p-p-p.site) 첫 모습은 서울 일대에서 전시되고 있는 작업들의 위치이다. 통상적으로 작업 제목을 명시하거나, 관람객에게 동선을 암시하는 전시 플로어 맵은 이곳에서 구글 지도로 대체된다. 작가명을 클릭했을 때만 그 작업의 설명과 사진, 영상 등을 볼 수 있다. 컴퓨터 스크린상으로 작업 사이사이를 마우스 커서로 이동하는 데에 몇 초도 걸리지 않지만, 실제 도시에서는 한두 시간의 이동거리로 늘어난다. 하지만 이내 그 이동거리를 계산하는 것이 무용할 정도로 각 작업이 진행되는 시간이 한정적임을 발견한다. ‘탑승 예약’이나 ‘초대장’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사실상 구글 지도에 고정적으로 위치된 장소들은 ‘그 장소에 작업이 있다’는 것이 아닌 ‘그 장소에 작업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전시’라고 명명하는 것은 온라인 홈페이지에 좀 더 가까울 수 있고, 실제 작업들은 ‘퍼포먼스’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 장소에 도착하더라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퍼포먼스 전체를 정확하게 복기할 수 없다. 오히려 홈페이지에 남아있는 현장 기록 이미지나 퍼포먼스를 다녀온 이들이 어딘가 남긴 기록들이 실제 장소보다 많은 정보를 줄 것이다. 여기에서 이 전시는 실제 장소에도 하나의 입구로 두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 있는 웹에서도 동일한 위상의 입구를 두고 있는 형태가 된다.

에피메테우스의 편지에서 시작된 최황의 <누구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와 ‘실존 인물’을 추적하는 김재민이의 <오근세의 길>은 그러한 접점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올림픽 공원에서 꺼지지 않는 성화와 그것을 닮은 올림픽대교 위 조형물, 두 가지 불의 이동과 소실을 기념하는 최황의 퍼포먼스는 웹상의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퍼포먼스 자리에 함께한 이들은 각자의 스크린을 통해서 앞선 파트를 볼 수 있었던 동시에 마지막 파트의 퍼포먼스 장면에 포함되면서 영상 한 켠에 자리 잡게 된다. 공동의 기억이 온라인 플랫폼에 남았다면, 그리고 그 짧은 뉴스 영상에서 이 작업이 시작된 것이라면, 퍼포먼스 실황을 보러 온 이들 역시 다시금 포섭되어 웹상에 남아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낸다. 김재민이는 오근세의 생가에서 현주소지를 따라 두 가지 순례길 루트를 제시하고,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장소들을 소개한다. 도시 공공성의 가치를 담고 있는 보행권은 도시담론 내에서 교통∙자본 등 사회적 역학관계로 인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한다는 딜레마로 언급되곤 한다. 하지만 이 보행권을 보장하는 루트가 공공이 아닌 인물 개인으로 환원되면서, 오근세의 길은 딜레마의 틈을 보여준다. 도시 계획가들이 공공을 위해 기획하던 수많은 보행 루트들은 개인을 기억하기에 순탄한 길이었을지. 그렇게 가상과 현실을 오가면서 길을 따르다가 마주하는 지역색 짙은 기념비는 이제 잠시 앉아 다리를 주무를 수 있는 장소로 변한다.

최태훈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웹공간을 활용하여 <영웅: 장군성>을 ‘업로드’한다. 개인 주택지로 보이는 주소와 역사적인 영웅의 모습이 충돌하고, 이 역사 속 인물은 다시 가상과 혼재된다. 낯설어 보일 수 있는 이 방식은 사실 도시 속 기념비가 공공을 고취시키고자 사용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인가를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공장소에 조각이 설치되거나 혹은 하나의 상품이 되었을 때, 그것이 역사에 기대어 있다 할지라도 가상에도 역시 한 발을 담그고 있다. 그렇기에 이 장군성이 순차적으로 웹에 ‘업로드’되는 과정들은 기념비의 가상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된다.

반대로 기념비 자체 내부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로 강은희의 <라이브-드라이브>다. 서울에서 도시를 표방하는 쇼핑몰 세 곳에서 진행된 퍼포먼스는 자동차를 타고 진행되었다. ‘이음매가 보이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나 ‘출구없는 미로’2램 쿨하스, 『정크스페이스』, 문학과지성사, 2020.와 같은 곳에서 탑승 장소에서 차를 탄 뒤 퍼포먼스는 시작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층을 가르면서 내려왔는지, 그리고 동승자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와 같은 질문들과 함께. 쇼핑몰이라는 구조 자체가 도시의 형태를 따르고 있기 때문인지, 수직적으로 지하를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는 그 구조를 가르는 듯하다. 하지만 곧 주차장에서 그 길을 잃고 자동차에 이끌려 나오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나눈다는 공유 의식은 그 플랫폼의 규모가 작을수록 강해지기 마련이고, 쇼핑몰과 비교하여 익명의 참여자와 자동차를 함께 타는 것은 의식(儀式)적인 행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동승자와 함께 스크롤이 내려지는 스크린에 띄워진 동굴과 대화 사이에 있으면서도, ‘예약’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은 잠시이다. 쇼핑몰 주차장의 틈을 비집고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타인의 존재를 명시하는 신청곡이 시작되면서 익명의 누군가를 향한 어긋남도 함께 경험한다.

타자에게 느껴지는 어긋난 불편함은 주현욱의 <어떤 부분집합은 전체집합에 구멍을 낸다>에서 모기를 지켜보는 그것과 유사하다. 모기를 위한 ‘공공’복지시설인 ‘서울모기집’은 아르코 예술가의 집과 연못이 있는 조경 사이, 유동인구들 사이에서 비교적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기서 ‘공공’이라는 이 수식어는 어긋난 불편함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데, ‘우리’의 ‘공공’에서 모기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대는 광장의 공공성이 구성될 때 가난한 자나 노숙인은 고려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맞물린다.3William H. Whyte, “The Social Life of Urban Spaces,” Project for Public Spaces, 2001, pp.60-65. 그렇다면 여기서 공공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공공의 경계를 등지고 늘 중심부로만 시선을 두고 있지 않았는지 되물을 수 있다. ‘공공’복지시설의 ‘공공’이 과연 공동의 ‘공공(公共)’일지, 아님 비어있는 ‘공공(空空)’일지.

작업들의 위치 중 가장 ‘공공’적 생각되는 곳은 아마 서울광장일 것이다. 하루 동안 진행된 차지량의 쇼케이스 <Party>는 광장 한쪽에서 한 시간 단위로 사람들이 모이고, 호텔로 함께 들어가고, 영상을 관람한다. 호텔로 안내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개인적인 방들의 집합인 호텔의 기류 때문인지 방의 문턱을 넘기 전까지 암묵적으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사적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호텔 ‘예약’을 통해 들어올 수 있는 방에서는 ‘개인적인 시공간의 조각’을 발화하는 영상과 몇 트랙의 음악이 영상으로 재생된다. 공간을 채우는 데에 가장 큰 효과를 주는 것이 음악임을 떠올려본다면 같은 방향의 시선으로 영상을 보는 이들은 작은 공동체가 된다. 하지만 이내 영상 <내세>가 시작되면서 등장하는 내세마을의 풍경은 공동체라 생각했던 이곳과 시차가 있음을 자각하게 한다. 영상 속 풍경과 음악은 서울광장에서 ‘공공’을 위해 보여지는 영상과 다른 속도이다. 호텔 유리창 밖 서울광장 위에 오버랩되는 내세마을의 풍경과 개인의 기념일은 우리가 믿던 ‘공공’이 과연 이 광장에서 구현되고 있었는지 작은 의문을 갖게 한다. 좀 더 이 의문을 밀고 나갔을 때, 서울 광장과 사적인 장소인 호텔이 유리창 하나로 서로 투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의 모습과 개인의 모습은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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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인용했던 보르헤스의 소설 속 문장의 바로 앞은 이렇게 된다. “순간적으로 그는 물속으로 도망치려고 생각했지만, 죽음이 자기의 노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작업을 용서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불길을 향해 걸어갔다.”4보르헤스(2011), p.76. 불길을 향해 걸어가던 그 의지는 그가 환영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선행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얀 팔라흐 사건은 당시에는 프라하에 정치적으로 큰 이슈를 남기지 못했다.5Jan Palach, “The Burning Bush,” Journey Prague, January 16, 2017.) 상기 이미지의 출처도 동일한 곳. 하지만 이후 영화와 함께 (그 자체에 담지된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이미지가 만들어지면서 팔라흐 사건에 대한 하나의 장면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전시를 하나의 이미지로 생각해보자. “공공의 영역 바깥에서 다른 공공이 다시 솟아오르게 할 것”6권태현, 「광장 조각 내기」, 《광장/조각/내기》 서문, 2020이라는 이 전시에서 미술은 광장을 조각 내고, 조합하고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상상하게끔 한다. 그리고 이 조각난 광장은 상상을 기반으로 더이상 물리적인 것에 지지체를 두지 않고, 미술과 공공의 사이에서, 그것이 환영적인 이미지라 할지라도, 일시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틈을 벌리기를 소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