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기억은 마포구에 위치한 홈플러스 계산대 앞에서 마주했던 MBK 매각 규탄 시위 장면에 멈춰있다. 마트 안을 나가는 마지막 관문이자 바깥과의 경계에서 만들어진 임시 광장. 잠시 시위를 하기 위해 일을 멈추고 모인 사람들, 함께 하지 못하고 계산대에서 묵묵히 바코드를 찍는 사람들, 감시하듯 저 멀리서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사람들, 그리고 약간은 불만 섞인 표정으로, 혹은 어찌할 바 모르는 당혹스러움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역할로만 나누어져 있던 이 공간이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로 분해되는 순간. 설마 친절하고 편안해야 할 마트 안에서 이런 걸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들과 조금 전 나에게 야채의 무게를 달아주고, 생선의 가격을 설명해주고, 내 카트를 조심스럽게 피해 걷던 직원들이 나를 가로막고 설 줄 몰랐다는 표정들이 나타난다. 몇 개의 이미지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이 날의 장면은 당시 들었던 어떤 소리들로 더욱 선명해져 갔다. 그것은 마트 ‘안’에서 ‘이런걸’ 봐야 하는 사람들을 멈춰 세우는 시위의 문장이 여전히 ‘고객님’으로 시작해서 높임말로 끝나는 풍경이었다.

얼핏 마트 직원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공손함을 잃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들은 계산대 앞의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만듦에 대해 사과하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잠시 후면 다시 돌아가야 할 일터이기도 한 간이 무대의 미약한 힘과 이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만들어질 침묵의 소음을 예견하듯이 그들은 한계의 장소 위에 정확히 한계의 언어로 서 있었다.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다소 건조하게 진행된 이 짧은 시위는 그렇게 일면식 없는 고객님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 듯, 호응과 응원 없는 차가운 현장에 개의치 않는 듯, 할 말을 이어갔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싸움이지만 이곳(에서 우리의 노동)을 이용하는 당신들도 외면할 수 없다는 당당함을, ‘우리’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상황을 알리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일’임을, 묵묵히 일하고 있다고 해서 일터의 갑질을 참는 것이 아니었음을 표현하는 몇 겹의 두터운 제스처였음을 회상해본다.

그렇게 일상 속 투쟁과 투쟁 속 일상을 가로지르는 장소 위에서 직원과 손님, 당사자와 관중, 계속 있을 사람과 스쳐지나갈 사람의 거리를 재확인하게 했던 짧은 퍼포먼스. 한계를 전면에 내세운 그 날의 장면은 연대, 동참, 공동체를 지향하는 마트 안의 모든 ‘우리’를 손쉽게 말하지 않으면서 무엇보다 지금 여기서 ‘외치고 있는 우리들’을 가시화했다. 그날 이후 마트를 가면 종종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마주쳤다. 점차 마트 안에서 시위를 보는 일이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한계의 장소처럼 보이는 곳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고 느꼈다. 어떤 장소와 활동에 대해 ‘한계’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이 행위의 의미를 부정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이미 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만 나오는 몸짓들을 모으기 위한 ‘시작’의 언어가 될 수 있을지 찾고 싶었다.

 

 

기억 속에서 이번 여름 제주의 따가운 햇볕 아래 함께 걸었던 강정마을 앞바다가 선명히 떠올랐다. 서울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제주로 가야 한다. 지도를 좀 더 줌 아웃된 곳으로 이동시킨다.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앞 작은 광장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정오가 되면 인간 띠잇기가 진행되는 곳이다. ‘인간 띠잇기’는 매일 나오는 사람과 새로 온 사람이 인사를 나누고 발언하고 해군기지 정문 앞까지 행진하고 강정 댄스를 함께 춘 뒤 해산하는 짧은 시위이다. 누구나 참여 가능하며 이미 그곳의 활동가들에게는 당연한 일과인 이 자리에 이끌어준 친구는 이것을 ‘일상 투쟁 활동’이라고 불렀다. 무거운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투쟁’이라고 하니 부담이 됐지만 실제로 그곳에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노래와 춤은 역동적이었고 반겨주는 사람들과의 눈인사에 경직된 몸과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깃발과 현수막을 하나씩 든 채로 기지 정문 앞까지 행진하고 그 앞에서 빙빙 돌며 춤을 추자 관계자와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긴장감이 제법 가까이에서 느껴지기도 했지만, 함께하는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얼굴들이 보여서 바로 안심이 되었다. 그날 저 멀리 보이는 해군기지는 크고 넓었고,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은 제주의 바다와 하늘은 새파랗고 아름다웠다. 돌아오는 길 강정천으로 흘러가는 맑고 투명한 냇길이소 앞에 소원 없이 쌓아 올린 돌탑 하나를 남겼다.

강정 마을 앞바다는 해군기지가 들어오기 전까지 주민들이 구럼비를 기리고, 흘러나온 강정천이 바다와 만나고, 여름이면 얼음장 같은 물이 더위를 식혀주던 장소였다. 삶의 터전이었을 그 길목에서 공사 반대를 외치고 해군기지 백지화를 외치며 시작된 인간 띠잇기였지만 이미 완공된 기지와 함께 꽤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이곳에 매일 모인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현장에서 여전히 똑같이 평화의 구호를 외치고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똑같은 춤을 추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이 ‘일상 투쟁 활동’을 두고 누군가는 ‘그런걸’로는 이미 지어진 해군기지를 어찌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아직 오지 않을 미래와 이미 와버린 미래 위에서 이곳의 사람들은 한계의 감각을 익히고, 한계의 몸짓을 연습하며, 한계의 장소에 맞게 살아간다. 기지가 들어섰다고 해서 끝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매일 평화를 바라고 자연을 아끼는 마음으로 그곳의 하루를 열고, 하루에 한 번은 꼭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과 깃발을 해군기지와 저 멀리 강정 앞바다에 보여준다.

 

 

대만에서 오키나와, 제주, 진도, 밀양, 고리 등을 자전거로 순례하며 한계의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주민운동과 사회운동의 목소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다른 세계>(2017)에는 오키나와의 다카에와 헤노코에서 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시위 장면이 나온다. 이곳은 2004년부터 지금까지도 기지 입구에서 사람들이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 그 목소리는 우리가 사는 이곳에 기지를 건설해서는 안된다가 아니라, 그런 기지는 어느 곳에도 필요 없다고 외친다.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작고, 기지 건설 현장의 소음은 너무 크고, 자연은 무참히 무너져가고 주민들이 슬퍼하는 장면들이 이어지는데 잠시 후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나온다. “헤노코에 다시 들렀다. 어쩐 일인지 그날 공사 차량이 오지 않았고 주민들은 신이 났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단 하루 공사가 중단되었던 날, 기지 앞에 시위하러 나온 주민들은 기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축제 분위기로 건설 현장 앞이 떠들썩하니, 마치 공사가 완전히 중단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마 내일은 공사가 재개될 것이고 주민들도 그것을 경험적으로 알 것이다. 그런데도 온 힘을 다해 기뻐하는 그 장면을 보며 한계의 장소 너머를 떠올렸고 이곳의 사람들은 내가 아직 보지 못하는 더 먼 시공간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다카에와 헤노코의 주민들은 공사가 중단될 때마다 축제처럼 기뻐하고, 강정 마을 주민들은 매일 인간 띠잇기를 하며 춤을 추고,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웅성웅성 그 주변에 몰려들며 그곳의 공기를 매일 자신들의 숨과 땀으로 섞어놓는다. 그렇게 한계의 장소마다 한계의 언어가, 다시 한계의 몸짓이 생긴다. 처음 온 사람에게는 똑같은 게 반복되는 것 같겠지만 그것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한계라고 불리는 곳을 점유해나갈 것이다. 이제 막 만들어진 한계의 장소들과 이미 저 멀리 가고 있는 한계의 장소들을 느슨하게 이어보며 큰 이상과 작은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과 행동하는 순간에 대해, 혹은 현장의 오브제와 미술의 자리이동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은 고민이 끝난 것처럼 간단히 문제의 맨 앞자리를 점유하곤 하는 이미지, 텍스트들 속에 여전히 이동 가능한 자리가 남아있는지 찾고자 하는 노력과도 긴밀하게 연결될 것이다. 일레인 스캐리의 말처럼, 실재하는 부분적인 대상이 상상 속 거대한 세계의 규모를 넘어서는 순간을 기다리며. 한계의 장소로부터.

“인간은 도시 하나를 상상하지만 그 대신 집 한 채를 ‘만들고’, 정치적 유토피아를 상상하지만 그 대신 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기여하며, 세계에서 고통을 없애는 일을 상상하지만 그 대신 친구가 건강을 회복하도록 간호한다. 인공적인 것은 이렇듯 상상하기보다 온건하고 단편적이지만, 그 대상은 상상된 대상과 비교했을 때 실제라는 엄청난 이점을 지니며 또 실제이기 때문에 공유 가능하다. 그 대상을 공유할 수 있기에 마침내 인공적인 것은 상상하기에서의 규모만큼이나 큰 규모를 갖게 된다. 상상하기의 산물이 처음으로 집단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1일레인 스캐리, 메이 옮김, 『고통받는 몸』, 오월의 봄, 2018, p.277.